대리점 눈치 보며 본사가 살아남는 법
2025. 4. 3.
제가 디자이너로서 첫발을 내디딘 곳은 식기세척기 제조업체였습니다. 저희 회사는 대리점 중심 유통 구조였기에 소비자 대상 마케팅이나 홍보 자료 활용에 제약이 많았고, 소극적인 운영 전략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대리점의 발주가 점차 감소하면서, 기존 유통망에만 의존할 경우 수익 구조가 불안정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생겼습니다. 또한 본사에서 바로 직판매를 하게 되면서 대리점들의 반발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대리점과의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소비자와 직접 접점을 만드는 전략이 필요했고 저는 그 틈을 파고들 수 있는 작지만 효과적인 방식으로 고객들에게 점진적으로 노출을 시도했습니다.
반복되는 전화 한 통에서 시작된 아이디어
입사 초기에 하루에도 여러 번, "시간 조절은 어떻게 하나요?", "온도 조절은 가능한가요?"와 같은 문의 전화가 본사로 걸려왔습니다. 많게는 하루 7~8통씩 반복되었고, 그만큼 고객들이 제품 사용 중 막히는 지점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기기 구매 시 동봉되는 사용설명서에는 이러한 조절 세팅 기능에 대한 안내가 별도로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는 시간 및 온도 조절 기능이 예민한 PCB(회로기판)와 직접 연결되어 있어, 무심코 조작할 경우 고장의 위험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지금까지는 본사나 대리점 모두 조심스러운 태도로 이 기능에 대해 대응해왔습니다.
하지만 반복되는 고객 문의를 접하면서, 저는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는 차원을 넘어, 이 상황 자체를 브랜드와 고객이 만나는 중요한 접점으로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사용설명서에 간단한 안내 문구를 추가하는 것만으로도 고객분들께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기능의 원리와 조작 방법을 정확히 이해시켜드리고, 그에 맞는 활용법을 스토어의 공지사항이나 게시판에 체계적으로 안내한다면 고객 입장에서는 문제 해결 이상의 신뢰를 느낄 수 있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브랜드를 각인시키고 제품을 알릴 수 있는 접점을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이런 접점이 단순한 A/S 대응이 아닌, 브랜드를 다시 한번 인식시키는 중요한 순간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한 것입니다.
자영업자의 하루 속에 우리가 끼어든다는 것

자영업을 하시는 고객들은 하루하루가 전쟁처럼 바쁩니다.
“오후 알바는 무사히 출근할까?”, “이번 달 야채값이 너무 올랐는데 납품업체를 바꿔야 하나?” 같은 고민이 일상이죠. 그런 와중에 제품의 시간 설정이나 온도 조절 방법 때문에 10~20분씩 전화로 설명을 듣는 건, 고객에게도 본사에게도 모두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게다가 사람이 직접 설명하는 구조는 감정적인 변수에 영향을 받기 쉽습니다. 상담 직원의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고객의 기분이 예민한 날이라면 단순한 설명조차 서로에게 불쾌한 경험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이런 작은 일 하나가 브랜드 전체에 대한 이미지로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단순히 '설명서 하나 만든다'는 생각보다는, 고객의 시간을 덜어주고 본사의 업무 효율도 높일 수 있으며, 동시에 브랜드에 대한 신뢰도 함께 구축할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특히 자영업 고객층이 40~50대인 점을 고려해, 글보다 이미지 중심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실제 버튼을 하나하나 캡처해 어떤 화면이 어떻게 나오는지 흐름대로 구성했고, 누구나 실수 없이 따라 할 수 있도록 순서를 꼼꼼히 정리했습니다.
완성된 자료는 자사 스마트스토어 공지사항에 게시해, 고객 문의 시 링크로 바로 전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고객 입장에서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료가 생긴 것이고, 본사 입장에서는 반복적인 응대에서 벗어나 시간을 절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료 하단에는 최근 출시된 제품 링크를 1~2개 정도만 자연스럽게 배치했고, 추가적인 문의가 있을 경우 바로 전화할 수 있도록 고객센터 번호도 함께 안내해 두었습니다. 처음 게시 이후에도 실제 반응을 보며 약 10회 이상 수정과 개선을 반복했고, 현재까지도 더 나은 구성으로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처음 만든 설명서가 나에게 가르쳐준 것


이 콘텐츠는 단순히 고객 안내 차원에서 제작한 설명서였지만, 결과적으로는 브랜드를 자연스럽게 노출할 수 있는 효과적인 마케팅 도구로 작용했습니다.
자사 스마트스토어 공지사항에 게시된 콘텐츠를 통해 고객 유입이 늘었고, 설명서 하단에 배치해 둔 신제품 링크를 통해 실제 구매로 이어지는 사례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한 번 우리 스토어를 방문한 고객은 이후 다른 플랫폼에서 유사 제품을 검색할 때 우리 제품이 상단에 노출되는 알고리즘 효과까지 발생하면서, 장기적인 관점에서도 브랜드 인지도와 노출 빈도를 꾸준히 끌어올리는 구조가 만들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콘텐츠는 단순한 문제 해결을 넘어서, 조용하고도 효과적인 퍼포먼스 마케팅의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내 첫 디자인 현장, 그리고 앞으로의 길
이번 작업은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사용자 경험을 어떻게 설계하고 개선해나갈 것인가’를 실질적으로 고민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기존에는 정보가 제공되지 않던 기능에 대해 ‘고객이 어떤 순간에, 어떤 정보를 필요로 하는가’를 시나리오로 구성해보았고, 그 흐름에 맞춰 UI 캡처, 정보 밀도, 텍스트의 길이까지 조절해 나갔습니다. 특히 사용자 연령대를 고려해 직관성과 단계적 안내에 집중했던 점은 실무에서 가장 많이 배우고 성장할 수 있었던 부분입니다.
결국 이 콘텐츠는 고객 안내를 넘어, 사용자 경험의 개선이 곧 브랜드 신뢰로 이어질 수 있음을 실증한 사례였습니다.
제한된 여건 속에서도 디자인을 통해 실질적인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으며, 이는 이후의 디자인 과정에서도 중요한 기준점이 될 것임을 확신했습니다.